누가복음 23장
32 또 다른 두 범죄자도 죽게 되어 그분과 함께 끌려가니라.
33
그들이 갈보리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범죄자들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있더라.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고
35
백성은 서서 지켜보는데 치리자들도 그들과 함께 그분을 비웃으며 이르되,
그가 남들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곧 그리스도이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라, 하더라.
36 또 군사들도 그분을 조롱하면서 그분께 나아와 식초를 바치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들의 왕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분 위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이라 쓴 글도 있더라.
39
매달린 범죄자 중의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다른 하나는 되받아서 그를 꾸짖으며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고
42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4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눅23:42)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도 이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가 어떻게 회개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 순간의 회개'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 사람의 회개를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회개가 점진적인 것이라면 이 불쌍한 강도는 회개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선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단번에 회개할 수 없다면, 이 강도가 어떻게 회개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회개하는 데 육 개월, 육 주, 혹은 엿새가 걸린다면 역시 그에게 전혀 구원의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서, 여러분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극악무도했던 이 사람을 주님께서 어떻게 대해주셨는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가장 악한 부류의 범죄자들이 십자가 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사람은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선고받았던 것입니다.
저명한 사람이 죽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남긴 마지막 말과 행동을 몹시 알고 싶어합니다.
"그분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마지막으로 행하신 일은 한 죄인을 구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셨고, 이 불쌍한 강도를 구원하시는 일로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그 먹이가 강한 자의 손에서 벗어날 것인가? 선고받은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권세에 사로잡힌 자가 풀려날 것이고, 공포에 시달리는 자가 해방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포로를 죽음의 입구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는 지옥의 경계선에 있었고, 그리스도는 사단의 손아귀에서 그를 나꿔채 오셨습니다. 마태, 마가는 주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강도들이 둘 다 그리스도를 비방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마27:44, 막15:32 참조). 그들은 강도일 뿐만 아니라 비방자들이었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씀에 이를 갈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강도들에게까지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만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 무리 가운데 그들의 어머니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들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관은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 그들은 살려둘 자가 아니다."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한 강도를 회개시켰냐?"는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기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아버지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오니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외치셨을 때, 주님의 그 말씀은 징벌이 하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형벌을 받았아도 강도들의 마음은 깨뜨려지거나 굴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긍휼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훼방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외침을 듣고, 그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지지 않았다. 나 같으면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게 해서 저 놈들을 다 불살라 버리라고 호령했을 텐데.'
거기서 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소리쳤지만, 또한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께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치고 계신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 중 한 강도는 자기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는 다른 강도를 돌아보며 오히려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 마음이 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다."라고 말했으며, 사도행전에서는 "큰 두려움이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그 두려움이야말로 강도의 마음에 믿음이 임할 첫번째의 징조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이미 유죄 선고를 받아버린 사람의 마음에 생명이 임할 것을 예고해주는 징조는 바로 이것입니다.
다음에 그는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판단했습니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스도를 거스려 말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지만, 이제 그는 "이 사람이 행한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주님을 조롱하고 있었지만, 강도들 가운데서 "그는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외치는 소리를 여러분은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겸손해졌습니다. "우리는 그릇 행하였고, 우리에 대한 선고는 정당하고, 우리는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자기에게 내려진 선고가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는 죄인들에게 전혀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자기들이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강도는 "우리들에게 내려진 선고는 정당하다."고 맔했습니다. 그는 범죄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자백했고, 그리스도를 '의롭다'고 평가했습니다. 죄인들은 자기들에게 내려진 선고가 정당하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그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하여 말한다면, 이 사람은 성경에서 가장 뛰어난 믿음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이 사람의 믿음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25년 동안 세워주신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히 믿을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설교와 비유를 들었고, 그분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아왔었지만, 주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열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는 주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아마 강도도 들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이마에 번쩍이는 왕관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가시 면류관이 쓰여져 있는 모습과, 군병들이 가한 상처를 보았습니다. 그의 눈으로는 주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어떤 징조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의 나라가 있다면 그의 백성들은 어디에 있는가?' 무리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소리쳤습니다.
"그때 병사들도 주를 조롱하고 가까이 와서 식초를 주며 말하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고 하더라." (눅23:36~37)
그러나 그 강도는 그를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성경에 언급된 어떤 믿음의 사람보다도 더 큰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됩니다.
소년 시절 나는 철자법에 서툴렀는데, 어느 날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아이에게 한 단어가 주어졌습니다. 그 아이는 철자를 맞추지 못하였고, 다른 아이들도 맞추기 못하여서 결국 제일 밑바닥인 나에게까지 그 단어가 내려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그것을 맞추어서 나는 졸지에 우리 반의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십자가의 강도도 그렇게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를 제치고 믿음의 정상에 올랐던 것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왕으로 믿게 된 한 사람을 얻게 된 일이 그리스도에게는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이 사람의 구원 간증에 대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예수님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간구했는데,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 강도는 첫번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았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행한 일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것이 참으로 당연하지만, 이 분은 아무 잘못을 행한 것이 없도다"(눅23:41)
그 때, 그의 마음에 믿음이 흘러들어왔고, 주님을 믿는 믿음이 일어나는 순간 그는 외쳤습니다.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필라델피아의 상당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는 있지만, 드러나게 그를 주님으로 부를 만한 담대함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이 강도는 얼마나 귀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혼자였으며, 옆의 강도도 그의 편이 아니었고,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 나라의 관리들이 거기에 있었으나, 이 역사적인 사건에 그 불쌍한 강도 외에는 아무도 바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어서 어린 시절에 그에게 이사야 55장을 가르쳐 주었다고 상상해 봅니다.
"너희는 주를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사55:6)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 강도는 즉시 주님을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나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문을 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기도할 수 없었다면, 이 불쌍한 강도는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아무 책도 없었고, 만일 누군가가 그에게 책을 주더라도 그것을 읽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짧았지만, 그에게 놀라운 축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것은 정곡을 찔렀습니다.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이 강도의 회개에서 보듯이 구원은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이 강도의 구원에 대해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양손과 양발이 다 못박혀 있는데,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손으로 일할 수도 없었고, 발로 달릴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손을 사용할 수 있었을 때 피 흘리는 데 사용했고, 자기 발을 사용할 수 있었을 때 악한 일에 사용해 왔습니다.
그는 그 입술로 주님을 시인했고,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는 것이지 손이나 발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일은 마음으로 믿고 함께 육체가 죽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강도는 훌륭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가 가령 50년 동안을 그리스도인으로 지내왔다 해도 십자가에서 한 것보다 주님을 위하여 더 크게 봉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세상 앞에서 주님을 시인했고, 1800년이 넘도록 그 고백은 효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의 기자(記者)들 모두는 그일을 기록했습니다. 그 사실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그들은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강도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팔을 주지는 않았지만, 창조주에게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는 주었다."
그는 기도하자마자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도의 첫 머리에 "주님"을 두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이 세 마디의 짧은 단어가 그를 하나님의 보좌에 연결시켜주는 사슬의 세 개의 황금 고리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부르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불렀고, 주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셔야만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을 불렀는데도, 주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일을,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본 적이 있습니까?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율법은 본래의 위치에 놓여지면 선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받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침례받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계명을 거스리는 이야기를 한다고 여러분들이 나를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침례도 본래의 위치에서는 올바르지만, 그것을 구원의 위치에 넣는다면 여러분은 올무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라도 침례를 주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리스도 앞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회개가 여기에 대한 완전한 해답입니다. '침례받지 않고는 낙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이 강도는 침례받지 않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비록 그가 침례받기 원했다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침례 줄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찬식에 참여하기 전에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강도는 성찬식에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누가 떡과 포도주를 그에게 베풀어주었겠습니까? 그 산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누가 그 강도가 구원받으리라고 믿었겠습니까? 로마 정부가 그에게 성찬과 침례를 베풀도록 허락해 주었겠습니까? 그는 생명을 얻으려고 구한 순간에 즉시 얻었습니다.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별개의 것입니다. 성찬식도 침례도 별개의 것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도 별개의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했고, 정죄받아 마땅하지만, 이 강도처럼 그리스도 앞에 곧장 나아오는 것이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겔18:4) 하나님은 당신의 법에 따라 죄인을 벌하실 권리가 있고, 그가 우리를 향하여 내리신 유죄 판결은 공의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 강도가 믿은 후에 즉시 거기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한 병사가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그 마음 속에 선지자 스가랴의 말씀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기 위한 샘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주민들을 위해 열리리라."(슥13:1)
그는 아침에는 십자가 아래로 끌려왔는데, 저녁에는 세세토록 써야할 면류관을 쓰고서 하나님의 낙원에 이르렀습니다. 아침에는 형벌을 받기 위해 끌려왔지만, 저녁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손을 잡고 낙원의 길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아침에는 어느 누구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지만, 저녁에는 하늘의 찬양 가운데로 올리워졌습니다. 아침에는 강도들과 동류였지만, 저녁에는 어린 양의 피로 씻어 정결케 돠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강도보다 조금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가 더 이상 외인(外人)일 수 없는 본향 집에 왔을 때 그를 환영하기 위하여 서두르셨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가 어두움의 시간 속에서 주님을 시인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세상의 구세주가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들에게는 어두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주님이 사기꾼이었다고 매도합니다. 이 어두움의 시대에 우리는 그 강도처럼 나아와서 주님을 시인하고 주님 편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런다면 주님은 그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강도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찬이라는 예식을 시작하셨을 때, 주님의 유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 강도의 요청은 자기가 주님의 나라에서 기억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요19:30 참조) 라는 그리스도의 말을 들었을 때, 그 강도의 심령이 얼마나 기뻐 뛰었겠는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좇기를 원했습니다. 군병들이 다리를 꺾으려고 왔을 때, 이 사람은 이미 서둘러서 가버렸을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몸을 떠나는 순간, 하늘로부터 내려진 병거로 옮겨졌을 것이며, 구세주를 만나러 갔을 것입니다. 그는 아침에는 저주받은 사람이었지만, 저녁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 없이, 소망 없이 저 강도처럼 죄로 어두워진 상태로 이 곳에 왔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오늘 밤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여기 계신 수천 명이, 구원 받으리라는 기대없이 그냥 호기심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청중들에게 임해서 그들이 죄인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구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주님은 당신을 기억하시고, 당신을 그 나라의 유업을 얻을 자로 삼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곧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그분는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원하시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 강도를 구원하신 주님은 바로 당신의 구세주이십니다. 여러분의 부르짖음도 그 강도의 부르짖음과 같아야 합니다. 지금 부르짖으십시오. 내가 말하고 있는 동안, 여러분은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고 속삭이고,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되었는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밤 그를 부르십시오.
그 강도는 성전 휘장이 찢어진 후에 그리스도를 따라 낙원에 들어간 첫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면, 그리고 보좌 주위를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보좌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보좌 곁에 있는 그 강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오늘 밤 거기에 있습니다. 순전히 그가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고 외쳤기 때문에 그는 거기서 1800년 동안이나 지내온 것입니다.
나는 거기서 막달라 마리아와 여리고성의 세리장 삭개오를 봅니다. 만일 그들에게 어떻게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그들은 "은혜로 구원받았소."하고 외칠 것입니다. 하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오 나의 친구여, 그 반열에 서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예수님, 나를 생각하소서."하고 소리를 높이십시오. 오, 나는 오늘 밤 수백 명이 그렇게 부르짖게 되도록 주님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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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또 다른 두 범죄자도 죽게 되어 그분과 함께 끌려가니라.
33
그들이 갈보리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범죄자들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있더라.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고
35
백성은 서서 지켜보는데 치리자들도 그들과 함께 그분을 비웃으며 이르되,
그가 남들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곧 그리스도이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라, 하더라.
36 또 군사들도 그분을 조롱하면서 그분께 나아와 식초를 바치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들의 왕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분 위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이라 쓴 글도 있더라.
39
매달린 범죄자 중의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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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되받아서 그를 꾸짖으며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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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고
42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4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눅23:42)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도 이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가 어떻게 회개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 순간의 회개'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 사람의 회개를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회개가 점진적인 것이라면 이 불쌍한 강도는 회개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선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단번에 회개할 수 없다면, 이 강도가 어떻게 회개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회개하는 데 육 개월, 육 주, 혹은 엿새가 걸린다면 역시 그에게 전혀 구원의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서, 여러분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극악무도했던 이 사람을 주님께서 어떻게 대해주셨는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가장 악한 부류의 범죄자들이 십자가 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사람은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선고받았던 것입니다.
저명한 사람이 죽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남긴 마지막 말과 행동을 몹시 알고 싶어합니다.
"그분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마지막으로 행하신 일은 한 죄인을 구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셨고, 이 불쌍한 강도를 구원하시는 일로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그 먹이가 강한 자의 손에서 벗어날 것인가? 선고받은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권세에 사로잡힌 자가 풀려날 것이고, 공포에 시달리는 자가 해방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포로를 죽음의 입구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는 지옥의 경계선에 있었고, 그리스도는 사단의 손아귀에서 그를 나꿔채 오셨습니다. 마태, 마가는 주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강도들이 둘 다 그리스도를 비방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마27:44, 막15:32 참조). 그들은 강도일 뿐만 아니라 비방자들이었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씀에 이를 갈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강도들에게까지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만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 무리 가운데 그들의 어머니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들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관은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 그들은 살려둘 자가 아니다."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한 강도를 회개시켰냐?"는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기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아버지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오니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외치셨을 때, 주님의 그 말씀은 징벌이 하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형벌을 받았아도 강도들의 마음은 깨뜨려지거나 굴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긍휼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훼방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외침을 듣고, 그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지지 않았다. 나 같으면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게 해서 저 놈들을 다 불살라 버리라고 호령했을 텐데.'
거기서 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소리쳤지만, 또한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께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치고 계신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 중 한 강도는 자기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는 다른 강도를 돌아보며 오히려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 마음이 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다."라고 말했으며, 사도행전에서는 "큰 두려움이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그 두려움이야말로 강도의 마음에 믿음이 임할 첫번째의 징조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이미 유죄 선고를 받아버린 사람의 마음에 생명이 임할 것을 예고해주는 징조는 바로 이것입니다.
다음에 그는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판단했습니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스도를 거스려 말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지만, 이제 그는 "이 사람이 행한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주님을 조롱하고 있었지만, 강도들 가운데서 "그는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외치는 소리를 여러분은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겸손해졌습니다. "우리는 그릇 행하였고, 우리에 대한 선고는 정당하고, 우리는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자기에게 내려진 선고가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는 죄인들에게 전혀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자기들이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강도는 "우리들에게 내려진 선고는 정당하다."고 맔했습니다. 그는 범죄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자백했고, 그리스도를 '의롭다'고 평가했습니다. 죄인들은 자기들에게 내려진 선고가 정당하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그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하여 말한다면, 이 사람은 성경에서 가장 뛰어난 믿음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이 사람의 믿음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25년 동안 세워주신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히 믿을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설교와 비유를 들었고, 그분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아왔었지만, 주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열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는 주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아마 강도도 들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이마에 번쩍이는 왕관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가시 면류관이 쓰여져 있는 모습과, 군병들이 가한 상처를 보았습니다. 그의 눈으로는 주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어떤 징조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의 나라가 있다면 그의 백성들은 어디에 있는가?' 무리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소리쳤습니다.
"그때 병사들도 주를 조롱하고 가까이 와서 식초를 주며 말하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고 하더라." (눅23:36~37)
그러나 그 강도는 그를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성경에 언급된 어떤 믿음의 사람보다도 더 큰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됩니다.
소년 시절 나는 철자법에 서툴렀는데, 어느 날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아이에게 한 단어가 주어졌습니다. 그 아이는 철자를 맞추지 못하였고, 다른 아이들도 맞추기 못하여서 결국 제일 밑바닥인 나에게까지 그 단어가 내려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그것을 맞추어서 나는 졸지에 우리 반의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십자가의 강도도 그렇게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를 제치고 믿음의 정상에 올랐던 것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왕으로 믿게 된 한 사람을 얻게 된 일이 그리스도에게는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이 사람의 구원 간증에 대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예수님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간구했는데,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 강도는 첫번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았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행한 일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것이 참으로 당연하지만, 이 분은 아무 잘못을 행한 것이 없도다"(눅23:41)
그 때, 그의 마음에 믿음이 흘러들어왔고, 주님을 믿는 믿음이 일어나는 순간 그는 외쳤습니다.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필라델피아의 상당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는 있지만, 드러나게 그를 주님으로 부를 만한 담대함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이 강도는 얼마나 귀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혼자였으며, 옆의 강도도 그의 편이 아니었고,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 나라의 관리들이 거기에 있었으나, 이 역사적인 사건에 그 불쌍한 강도 외에는 아무도 바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어서 어린 시절에 그에게 이사야 55장을 가르쳐 주었다고 상상해 봅니다.
"너희는 주를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사55:6)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 강도는 즉시 주님을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나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문을 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기도할 수 없었다면, 이 불쌍한 강도는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아무 책도 없었고, 만일 누군가가 그에게 책을 주더라도 그것을 읽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짧았지만, 그에게 놀라운 축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것은 정곡을 찔렀습니다.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이 강도의 회개에서 보듯이 구원은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이 강도의 구원에 대해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양손과 양발이 다 못박혀 있는데,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손으로 일할 수도 없었고, 발로 달릴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손을 사용할 수 있었을 때 피 흘리는 데 사용했고, 자기 발을 사용할 수 있었을 때 악한 일에 사용해 왔습니다.
그는 그 입술로 주님을 시인했고,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는 것이지 손이나 발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일은 마음으로 믿고 함께 육체가 죽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강도는 훌륭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가 가령 50년 동안을 그리스도인으로 지내왔다 해도 십자가에서 한 것보다 주님을 위하여 더 크게 봉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세상 앞에서 주님을 시인했고, 1800년이 넘도록 그 고백은 효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의 기자(記者)들 모두는 그일을 기록했습니다. 그 사실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그들은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강도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팔을 주지는 않았지만, 창조주에게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는 주었다."
그는 기도하자마자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도의 첫 머리에 "주님"을 두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이 세 마디의 짧은 단어가 그를 하나님의 보좌에 연결시켜주는 사슬의 세 개의 황금 고리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부르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불렀고, 주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셔야만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을 불렀는데도, 주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일을,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본 적이 있습니까?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율법은 본래의 위치에 놓여지면 선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받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침례받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계명을 거스리는 이야기를 한다고 여러분들이 나를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침례도 본래의 위치에서는 올바르지만, 그것을 구원의 위치에 넣는다면 여러분은 올무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라도 침례를 주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리스도 앞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회개가 여기에 대한 완전한 해답입니다. '침례받지 않고는 낙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이 강도는 침례받지 않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비록 그가 침례받기 원했다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침례 줄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찬식에 참여하기 전에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강도는 성찬식에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누가 떡과 포도주를 그에게 베풀어주었겠습니까? 그 산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누가 그 강도가 구원받으리라고 믿었겠습니까? 로마 정부가 그에게 성찬과 침례를 베풀도록 허락해 주었겠습니까? 그는 생명을 얻으려고 구한 순간에 즉시 얻었습니다.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별개의 것입니다. 성찬식도 침례도 별개의 것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도 별개의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했고, 정죄받아 마땅하지만, 이 강도처럼 그리스도 앞에 곧장 나아오는 것이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겔18:4) 하나님은 당신의 법에 따라 죄인을 벌하실 권리가 있고, 그가 우리를 향하여 내리신 유죄 판결은 공의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 강도가 믿은 후에 즉시 거기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한 병사가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그 마음 속에 선지자 스가랴의 말씀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기 위한 샘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주민들을 위해 열리리라."(슥13:1)
그는 아침에는 십자가 아래로 끌려왔는데, 저녁에는 세세토록 써야할 면류관을 쓰고서 하나님의 낙원에 이르렀습니다. 아침에는 형벌을 받기 위해 끌려왔지만, 저녁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손을 잡고 낙원의 길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아침에는 어느 누구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지만, 저녁에는 하늘의 찬양 가운데로 올리워졌습니다. 아침에는 강도들과 동류였지만, 저녁에는 어린 양의 피로 씻어 정결케 돠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강도보다 조금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가 더 이상 외인(外人)일 수 없는 본향 집에 왔을 때 그를 환영하기 위하여 서두르셨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가 어두움의 시간 속에서 주님을 시인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세상의 구세주가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들에게는 어두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주님이 사기꾼이었다고 매도합니다. 이 어두움의 시대에 우리는 그 강도처럼 나아와서 주님을 시인하고 주님 편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런다면 주님은 그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강도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찬이라는 예식을 시작하셨을 때, 주님의 유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 강도의 요청은 자기가 주님의 나라에서 기억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요19:30 참조) 라는 그리스도의 말을 들었을 때, 그 강도의 심령이 얼마나 기뻐 뛰었겠는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좇기를 원했습니다. 군병들이 다리를 꺾으려고 왔을 때, 이 사람은 이미 서둘러서 가버렸을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몸을 떠나는 순간, 하늘로부터 내려진 병거로 옮겨졌을 것이며, 구세주를 만나러 갔을 것입니다. 그는 아침에는 저주받은 사람이었지만, 저녁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 없이, 소망 없이 저 강도처럼 죄로 어두워진 상태로 이 곳에 왔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오늘 밤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여기 계신 수천 명이, 구원 받으리라는 기대없이 그냥 호기심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청중들에게 임해서 그들이 죄인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구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주님은 당신을 기억하시고, 당신을 그 나라의 유업을 얻을 자로 삼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곧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그분는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원하시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 강도를 구원하신 주님은 바로 당신의 구세주이십니다. 여러분의 부르짖음도 그 강도의 부르짖음과 같아야 합니다. 지금 부르짖으십시오. 내가 말하고 있는 동안, 여러분은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고 속삭이고,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되었는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밤 그를 부르십시오.
그 강도는 성전 휘장이 찢어진 후에 그리스도를 따라 낙원에 들어간 첫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면, 그리고 보좌 주위를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보좌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보좌 곁에 있는 그 강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오늘 밤 거기에 있습니다. 순전히 그가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고 외쳤기 때문에 그는 거기서 1800년 동안이나 지내온 것입니다.
나는 거기서 막달라 마리아와 여리고성의 세리장 삭개오를 봅니다. 만일 그들에게 어떻게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그들은 "은혜로 구원받았소."하고 외칠 것입니다. 하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오 나의 친구여, 그 반열에 서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예수님, 나를 생각하소서."하고 소리를 높이십시오. 오, 나는 오늘 밤 수백 명이 그렇게 부르짖게 되도록 주님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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